억척빼기 재미동 댁
내 안방 벽에는 하얀 달력이 걸려 있다. 그 달력에는 월·수·금 요일마다 굵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노인 일자리에 나가는 날이다. 잊지 않으려고 표시해 둔 것일 뿐만 아니라, 아직 내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표시다.
처음 신청서를 냈을 때는 바로 일을 할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대기자로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순서가 되어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1년째 참여하고 있다. 허리가 아파도 새벽 공기를 마시며 마을을 돌고 오면 마음이 상쾌하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을 때마다 내가 아직 활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변산면 어촌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스물두 살에 논농사가 많은 행안면으로 시집을 왔다. 시댁은 4남 4녀의 대가족이었고 남편은 장남이었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심이 되었다. 칠 남매의 혼사를 중매로 이어 모두 서울로 분가시켰다. 사람들은 나를 “여장부”라고 불렀다. 한때는 부안 인근과 고창 심원까지 다니며 바지락 작업반장을 맡았다. 인력을 조정하고 일을 나누었다. 손이 빨라 수입도 괜찮았다. 10년 가까이 맨손어업을 하며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 힘들었지만 가족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며 버텼던 것 같다. 두 아들을 키웠다. 장남은 대학에 가고 싶어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했다. 나는 학비 대신 서울 근처에 작은 빌라를 마련해 주었다. 그 집이 재개발되어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종로에서 철물 도매상을 하며 스스로 삶을 꾸려가고 있어 대견하다.
차남은 술 문제로 오랜 시간 힘들게 지냈다. 타이르고 붙잡으며 함께 버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 7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은 참으로 큰 아픔이다. 시간이 지나도 빈자리는 그대로다. 그래도 나는 기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남은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 내 몫이라 생각했다.
나는 50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돌아가시기 전 5년은 치매로 힘든 시간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밤중에 나가려 하실 때도 있었다. 힘들었지만 끝까지 모시는 것이 내 도리라 여겼다. 시댁 식구들과는 지금도 정이 두텁다. 된장과 고추장을 담아 나누고, 어버이날이면 빠짐없이 찾아온다.
지금 나는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허리는 여전히 아프지만 큰 병 없이 지내는 것이 감사하다. 골다공증약을 챙겨 먹으며 관리하고 있다. 쉬는 날에는 경로당에 가서 설거지를 먼저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억척빼기 재미동 댁”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 별명이 싫지 않다. 그만큼 열심히 살아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 동그라미는 내가 아직 세상 속에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표시다. 둥글 동굴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내가 참 좋다.
방송단 이명례 작가